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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과 내 운명에 완전히 침잠해 있다가도 문득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전쟁이나 세상 사람들의 살의(殺意), 그들의 경솔함이나 야만스러운 쾌락욕, 도 그들의 비겁함 등 모든 것을 나 자신에게서 다시 발견했다. 처음에는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그리고는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사라져버렸고, 혼돈으로 향한 시선을 끝까지 거두지 않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그 혼돈의 저편에서 자연과 순수함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스러지곤 했다. 깨어나서 정말로 의식을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혹은 여러 번 황야를 통과하는 그 좁은 길을 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괜한 헛수고일 것이다.

 

친구들이 나를 떠나갈 때마다 때때로 마음이 아팠지만 불쾌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내가 가는 길이 옳음을 확인해주는 것쯤으로 여겼다. 예전의 나는 호감이 가는 사람이며 시인이었던 반면에 현재의 내가 안고 있는 문제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역겹다고 하는 옛 친구들의 말은 물론 옳았다. 취향이나 성격에 관한 문제에서 그 당시 나는 이미 제쳐놓은 사람이었고 내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친구들이 내 글에서 아름다움과 조화가 사라져버렸다고 비난했을 때 그들의 생각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우스울 따름이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 목숨을 내놓고 무너져내리는 벽 사이를 달리는 자에게 도대체 아름다움이나 조화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