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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의 작가정신과 내 문학작품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나의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난 이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것도 더 이상 내게 진정한 기쁨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한 가지라도 낙이 있어야 하듯이, 온갖 고난을 당하고 있는 내게도 기쁨이 필요했다. 나는 정의와 이성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으며, 이 세상은 그와 같이 추상적인 가치들이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약간의 기쁨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약간의 기쁨을 향한 욕구는 내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꽃들 가운데 하나였고, 나는 그 불꽃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세계를 새롭게 재창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포도주 한 병을 비우면서 그것으로 나의 기쁨과 꿈 그리고 잊혀진 기억을 대신 달래는 일이 잦았다. 포도주가 내게 큰 위안이 되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완전히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덧 나이 사십이 된 나는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스스로를 화가라고 생각했거나 화가가 되려고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근사한 일이며 더 큰 기쁨과 인내심을 부여해준다. 또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는 글을 쓸 때처럼 손가락이 온통 시커매지는 것이 아니라 붉은 색과 푸른 색 물감으로 얼룩진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가지고 또 못마땅해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리고 보면 나는 인복이 없는 편이다. 내가 꼭 필요한 일이나 행복을 느끼는 일, 혹은 근사한 일을 해보려고 하면 그때마다 사람들은 싫은 기색을 드러낸다. 그들은 내가 옛 모습 그대로 머물기를 원하고 또 내 얼굴이 변치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 얼굴은 그러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욕구대로 자주 변화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