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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나는 피로감과 잔혹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그 모든 현실에 대한 역겨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그 고통을 끝낼 시간이 된 것 같았다. 방해 받지 않고 순수한 예술가 놀이를 하는 것이 내게 허락되지 않는다면 내 생애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바쳐온 좀더 진지한 기술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술 없이 이 세상에서 버텨내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일분간 나는 호흡을 멈춘 채 서서 현실의 망상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나서 내 그림 속에 그려진 기차를 타고 그곳을 잠시 둘러봐야겠으니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간수들에게 공손히 부탁했다. 그들은 나를 정신병자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여느 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

 

여하튼 나는 내 몸을 작게 만들어 내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는 작은 기차에 올라타고 어두컴컴한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동안 터널의 둥근 입구에서 솜털 같은 연기가 나오는 것이 보였으나, 곧 연기는 차츰 옅어지더니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연기와 더불어 그림 전체와 나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간수들은 당황하여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짤막한 자서전, <헤세 전집>(총 12권)중에서 제6권, 391쪽 이하

ⓒ 주어캄프 출판사(프랑크푸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