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그 할머니의 감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나는 그 감격을 함께 나눌 수 없었고 또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녀처럼 감격스러워 하는 간병인이 부상병 열 명당 한 명 꼴이라면 그런 여인들의 행복은 값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다.

 

나는 위대한 시대에 대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처음부터 전쟁으로 고통스러워 했으며,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갑자기 외부로부터 들이닥친듯한 불행에 수년동안 절망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는 동안 내 주변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불행에 대해 기뻐하며 열광하였다. 전쟁을 축복하는 작가의 신문기사나 교수들의 호소문, 혹은 저명한 시인들이 쓴 전쟁시 등을 읽을 때마다 나는 더욱더 비참해졌다.

 

1915년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와 같이 비참한 마음을 사람들 앞에서 털어놓고 말았다. 그것은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증오를 설교하고 거짓을 퍼뜨리며 큰 불행을 칭송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 말이었다. 그처럼 조심스럽게 표명한 하소연의 결과로 나는 조국의 언론에서 반역자로 매도 당하게 되었다. 그 동안 언론과의 접촉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에 의해 욕을 먹는 상황에 처한 일은 한번도 없었으므로 그것은 내게 새로운 체험이었다.